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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학기 가장 공들인 레포트 하나를 그냥 공개합니다. 왜 이걸 공개하냐면 처음부터 레포트같이 쓰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고(진짜 토씨하나 안틀리고 이렇게 제출했습니다), 공개할걸 처음부터 고려하고 쓰기도 했고 무엇보다...이런건 너무 특이해서 레포트를 베끼고 싶어도 베낄수가 없죠. 게임이론같은거 몰라도 다 패쓰하면서 보면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담당 교수님께선 이 레포트를 보고 재미있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어째서......

 

-mazefind


배트맨은 초인이 아니다. 그래서...

 

히어로물이 뻔하다. 당연히 악당이 설치는 도시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는 초인적 힘을 가진 히어로가 존재한다. 악당들은 어떻게 힘을 써 보려 하지만 결국 정의의 힘은 이길 수 없다. 마치 자우림의 <격주 코믹스> 음악을 듣는 듯하다.

하지만 그 뻔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영화를 본다. 물론 거기서 스토리는 큰 역할을 차지하지 않는다. 보통은 액션이나 CG등을 통해 그 영웅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배트맨:다크나이트>를 보면 그 환상은 무너지게 된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배트맨:비긴스>와 일부 연결이 되어 있는데 이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조커 카드는 바로 다크나이트에서 등장하는 조커를 의미한다. 이른바 시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배트맨에게 그 시련은 가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다.

일반 선량한 시민들이 죽는 것도 아니다. 그의 연인이 될 뻔한 레이첼이 죽고 하비는 ‘투페이스 하비’가 되어 복수를 하다가 결국 영화 막판에 악당으로 숨을 거두게 되며, 악당으로 보이는 존재조차 조커에 의해 숨을 거둔다. 거기에 선량한 범죄자(?)나 시민들의 혼란은 이루 말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의 각 상황, 그리고 전체적인 스토리 자체까지 조커의 손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배가 터지지 않은 것만 뺀다면 조커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이에 비해 배트맨은 시종일관 고민한다. 진정한 선과 악과 정의에 관해서. 또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끝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조커의 계획은 그만큼 치밀했다.

여기서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배트맨 자체는 전형적인 히어로지만 그는 다른 영웅들과 달리 인간이다. 단지 보조 무기가 많고 남들보다 체력이 강하다. 어릴 때 사고를 당해 힘이 생겼다거나 외계에서 떨어진 인간같이 생긴 외계인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외형상으로는 하나같이 이상하지만 고담시의 악당도 결국은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 하에서 최적화된 판단을 내려야 하며 어느 한 쪽을 포기하기도 해야 하고 언제나 합리적인 행동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트맨>은 히어로물이 아니다. 정의라고 주장하는 쪽과 악의라고 주장하는 쪽의 비정한 전략게임의 연속인 것이다.

다크나이트의 전략게임도 영화 첫 부분부터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배트맨은 결국 승리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전투에 이겼지만 전쟁에는 진 꼴”이 되고 말았다. 객관적인 능력은 배트맨쪽이 훨씬 많았음에도 잃은 것은 배트맨이 더 많았다. 마음만 바르게 먹었다면 칼 몇자루와 폭탄 몇 개로 더 많은 계획을 짤 수 있었던 조커 쪽이 더 히어로에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더더욱 아쉽다. 배트맨이 전략이라는 걸 좀더 알았다면, 배트맨이 좀더 똑똑했다면 더 빨리 조커를 제압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영화 전반에 나타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물론 게임이론을 최대한 빌린 전례없는 영화 리뷰가 될 것이다.

 

 

첫 장면부터 - 약속이행의 함정

첫 5분은 그 영화의 전반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순간적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부터 조커가 반전의 게임을 짜는 데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적은 비용을 들인 채 효과적으로.

게임의 상황은 이러하다. 영화 속에는 악당이 6명 등장한다. 옥상에서 내려온 2명 중 1명(악당5)은 경보를 차단하고 1명(악당4)은 금고 문을 따며 3명(악당3, 2, 6)은 로비를 제압한다. 마지막 1명(악당1)은 도주를 위해 스쿨버스를 몰기로 한다. 여기까지는 보통 강도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조커는 여기에 한 가지 개인적인 계획들을 추가한다. 각 과정이 끝나면 상대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 결과는 영화 내용과 같다. 옥상조의 2명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이고, 남은 1명은 로비조의 1명에게 죽는다. 버스를 몰고 온 한 명도 다른 로비조의 일당에게 죽는다. 다른 2명은 각각 은행직원의 총에 맞거나 버스에 치여서 죽는다. 결국 남은 사람은 ‘조커’다.

가장 처음 명령을 받은 사람을 예로 들어서 게임 트리를 간단하게 짜 보자. 행위자는 총을 쏘는 사람 1명뿐이며, 상대방도 이런 명령을 받았는지는 모른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는 가장 처음 악당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각자 다른 지시를 받고 거기에 맞게 행동할 뿐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악당’이므로 총을 쏘는 데에 대한 어떠한 망설이는 요소도 없다는 가정도 필요하다(마지막에 “쟤도 사람인데…….”라고 망설인다면 배트맨의 악당스럽지 않다). 그에게 상대를 죽이라는 명령이 들어왔다. 임의의 2사람에게 이런 명령을 했다면 게임 테이블은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훔친 돈은 6억 8천만이라고 마피아들의 회의에서 공개된다. 만약 이 금액을 조커까지 합쳐서 7등분한다면 1사람당 약 9천 7백만의 이익이 분배된다. 만약 계획 도중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이 분배액에는 변화가 없다. 하지만 다른 악당을 죽인다면 1억 1천만으로 금액이 올라간다. 계획 수행 뒤 죽이는 것이니 자기 팀의 계획에도 차질이 없다. 인간적 자비심도 없다. 따라서 악당은 상대를 죽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여기에서 가정이 발동한다. 악당 개개인은 자신만이 이러한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실 조커는 다른 팀원들에게 비슷한 명령을 내렸다. 2명이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정확한 명령은 알 수 없지만 이를 추측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악당3은 금고를 털러 가는 것이었으니 은행원에 의해 죽은 악당2는 ‘돈을 가지고 오면 악당3을 죽여라’식의 명령을 받았을 거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경우 게임은 동시다발적 게임이 아닌 각자의 판단 트리로 전환되는 효과가 있다.

 

이 상황에서의 포인트는 각각의 행위자가 서로의 명령을 모른다는데 있다. 게다가 1:1상황에서 각자가 판단하도록 계획이 짜져 있었다. 옥상에서도 2사람이 있었고 금고에서도 2사람이 대화를 나누었으며 (차질이 있긴 했지만) 돈을 가지고 와서도, 버스가 도착했을 때도 전부 2사람이 각자 판단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를 죽이는 지는 알지만 누구에 의해 죽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그렇게 명령을 내렸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한다. 만약 모두가 한 자리에서 그 명령을 들었다면 모든 악당이 그 명령을 거부했을 것이다. 죽임을 당하는 악당은 자신의 생명을 결국 잃게 되니 당연히 거부하고 남을 죽이는 명령을 들은 악당도 다른 악당의 배신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 없으므로 명령을 거부한다. 즉, 폐쇄성은 이 게임의 핵심이자 이 게임이 유지되기 위한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게임에는 반전 요소가 숨어 있었다. 조커 본인도 이 게임에 직접 행위자로 개입하고 있었다. 악당2의 경우 대화과정에서 폐쇄성의 함정을 알아챘기 때문에 첫 사진에서와 같이 조커를 협박할 수 있었지만 이 때는 너무 늦었다. 만약 이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악당2는 자신이 이 돈을 조커와 반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버스기사도 비슷한 수준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조커에게 죽었다.

개인적으로는 최대한의 이득을 노릴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했지만 결국 이득을 챙기는 사람은 모든 계획을 짠 조커뿐이었다. 이 점에 있어선, 게임 진행은 다르지만 그 함의가 죄수의 딜레마와 유사하다. 그리고 그 딜레마의 원인이 상호간 소통의 부재, 즉 폐쇄성에 있었다는 것도 죄수의 딜레마와 유사하다. 조커는 이 계획을 각 악당에게 보내는 전화 몇통만으로 시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린 셈이다.

 

 

첫대면에서 - 배트맨은 왜 피했는가?

 

 

배트맨과 조커는 이 장면 전까지 서로 만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이 장면에서 처음 맞대면을 한 것인데 하필이면 그 장면이 치킨 게임의 장면이다. 하지만, 사진의 장면이 나오기 위해서는 조커가 경찰의 방해를 하는 장면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앞에서 등장하는 경찰의 하비덴트를 이송하는 장면에 대한 게임 분석이 필수적이므로 이를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다.

경찰이 자신이 배트맨이라고 밝힌 하비 덴트를 경찰이 이송하게 되는데 이미 경찰은 교통통제를 통해 이송경로에 방해물이 없도록 해 놓은 상태다. 따라서 배트맨(하비)를 만나고 싶어하는 조커는 이 이동경로를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조커는 방해를 해야 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한 선택지가 생긴다. 만약 조커가 진로방해를 하게 된다면 경찰도 우회를 해야 할지 하지 않을 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각 행위자(조커, 경찰)의 선택에서 어떤 것이 이득인가? 경찰의 입장에선 조커가 방해를 하지 않고 계속 진행되기를 가장 바라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진로 방해 요소가 있다고 할 때 안전이 확보된 예정 진로로 들어가는 것이 이득이다. 조커의 계획대로 우회한다면 그대로 함정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커의 경우 방해를 해서 자신의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좋다. 진로방해를 해서 진행한다면 방해한만큼의 피해가 경찰에게 있으니 그 다음으로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고, 방해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은 선택이다.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게임트리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조커와 경찰의 경우 서로 어떤 선택을 할 지를 알 수 없으나 이 게임이 동시다발적 게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두 행위자가 동시에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커가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경찰도 어떤 행동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이 게임만 보자면 조커가 진로방해를 했다고 가정할 때 계속 진행하는 것이 더 이득이다. 하지만 조커는 위협의 강도를 늘리는 행위를 통해 이 기대값을 바꾸었다. 트럭 하나를 완전히 넘어뜨림으로서 ‘계속 진행한다’는 선택지를 막아버린 것이다. 이런 행동(위협)을 하게 되면 경찰은 계속 진행할때의 트럭과 충돌하는 손해값이 우회를 통해 얻는 손해보다 커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하비를 이송하는 경찰 일행은 우회한다는 선택지를 택하게 되었고 조커는 자신의 기대값을 최대로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조커가 함정에 걸려든 경찰 일행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있을 때 배트맨이 뜻하지 않게 방해(?)를 한다. 결국 대도 한복판에서 배트맨의 오토바이와 조커가 충돌하게 된다. 보통의 치킨게임이라면 양 행위자가 서로 달려드는 예로 설명되지만 영화의 경우 조커 쪽이 멈춰 있다. 보통 치킨게임은 두 행위자가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동시다발적 게임으로 분류되며 전형적인 게임테이블은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모두 피한다는 선택을 택한다면 아무런 이득도 없지만 한 쪽이 피한다면 한쪽은 겁쟁이라는 말을 듣기 때문에 손해를 보며 둘 다 돌진할 경우 둘 다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이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배트맨과 조커의 경우는 일반적인 치킨 게임과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일단 두 행위자 모두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총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배트맨의 경우 오토바이에 장착되어 있다). 따라서 둘다 돌진한다는 선택지로 가기 전 총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결과를 충분히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바로 한 쪽이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는 점. 따라서 선택지나 가정에 차이가 나게 된다. 같이 총을 쏜다고 가정하면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배트맨 쪽이 피할 확률이 높다. 또 조커는 탈 수단이 없는 데 반해서 배트맨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즉, 일반적으로 둘다 죽는 치킨 게임과 달리 이 경우에는 조커만 사망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이 생사를 건 게임은 다시 만들 필요가 있다. 원거리에서 총을 사용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또, 총을 사용해서 돌진할 경우 배트맨 쪽에서는 조커를 들이박을 것인지, 피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고 조커 쪽에서는 가만히 멈춰 있을지, 피할 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어느 상황이 되었건 장비와 속도가 뒷받침되는 배트맨 쪽이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임의의 숫자를 매겨 평가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게임테이블을 작성할 수 있다.

 

 

이 경우 배트맨과 조커가 접근 할 경우에 대해 하위 레벨의 게임테이블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 테이블을 먼저 풀어야 한다. 배트맨의 경우 피하는 것보다 돌진할 경우의 이득이 훨씬 높으므로, 즉 돌진한다는 선택지가 우월 전략(dominate strategy)이므로 배트맨은 이 전략을 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조커는 배트맨이 돌진한다는 가정하에 피한다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 때의 가정된 값은 (7, 3)이다.

상위레벨로 돌아가자. 배트맨과 조커가 함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접근할 때의 얻는 이득값은 (7, 3)로 정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배트맨은 여전히 오토바이의 총을 통해 사격하는 것이 유리하다. 또 조커도 이에 맞춰서 사격을 하는 편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더 좋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트맨의 행동이다. 객관적인 상황이나 가정은 이 게임에서나 실제 영화에서나 배트맨이 훨씬 더 유리했다. 영화 내 다른 상황과 달리 이 장면에서는 인질과 관련된 가정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배트맨은 단순히 돌진만 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엔 피하기까지 했다. 결국 영화에서 조커를 피한 배트맨은 그의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다치게 되고 조커는 이런 상황의 배트맨에게 총을 겨눈다.

이 영화의 심각한 문제는 이 원인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트맨이 생각하는 악과 정의의 문제에서도 그렇다할 해답을 찾을 수 없고 그 순간 기계에 무슨 고장이 난 것도 아니다. ‘나는 사람만을 죽이지 않겠다’는 도덕심 정도가 그 해답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 히어로는 너무 착하다.

 

 

레이첼과 하비 - 둘 다 살릴 수는 없었나?

 

 

배트맨이 레이첼과 하비 중 한 명을 선택하는 장면은 영화 전체 스토리상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영화의 결과만 따지고 말해보자. 이 장면 이후 하비는 레이첼과 자신의 얼굴 반 쪽을 잃고 이 슬픔으로 인해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하비, 고든, 그리고 배트맨이 연결되어 있던 고리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비의 타락조차 조커는 ‘최종 카드’로 계획해두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의 결과가 달라졌다면 영화의 결말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일단 구하러 가는 장면부터 생각해보자. 슈퍼맨같은 초인 형태의 히어로라면 그냥 날아서 한쪽을 구하고 텔레포트라도 해서 다른 한쪽을 구한 후 간단히 빠져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런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의 악당은 히어로를 괴롭히는 스케일도 비례해서 커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배트맨의 본질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인물만을 구할 수 밖에 없다.

경찰을 통해 왜 배트맨이 레이첼을 포기하고 하비를 구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영화를 보는 관객에 판단을 맡긴 것이고 따라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하는 점은 이런 영화 스토리가 아니다. 잘 생각해보면,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커가 좀 더 빨리 말했다면 경찰 쪽에서도 시간적 여유가 늘어나 둘 다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이미 조커가 레이첼, 하비를 둘 다 납치했다는 사실을 (배트맨을 포함한)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조커 외에는 두 인질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이 가정 하에, 상황을 게임 트리 형식으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조커가 말하지 않을 경우 인질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앞의 가정에서 다른 사람들은 인질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해 두었기 때문이다. 배트맨이 경찰과 함께 찾는다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배트맨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심문을 통해 조커에게서 인질의 위치를 자백받아야 한다. 조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행동할까? 조커는 배트맨의 고민하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따라서 다른 선택지는 조커에겐 이미 중요하지 않다. 오직 늦게 자백해서 둘 중 하나, 또는 둘 모두가 죽는 장면이 보고 싶을 뿐이다.

게임의 결과는 정해졌다. 배트맨에게도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유리하고 조커의 입장에서도 자백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 최대의 만족감을 줄 수 있다. 문제는 그 시간이다. 조커는 어떻게 해서건 늦게 자백을 하는 것이 유리하고 배트맨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빨리 조커의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 당연히 이 둘은 상충되는 이득이다.

배트맨이 이 게임에서 불리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게임이론으로 돌아가보자. 확언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기댓값을 변화시켜 상대방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수단이다. 이 수단에는 대표적인 것으로 상대보다 먼저 행동을 한다거나 상대에게 약속이나 협박을 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에서 배트맨은 그 어떤 것으로도 조커의 기댓값을 바꿀 수 없었다. 조커가 먼저 납치라는 행위(계획)을 실행했으니 그보다 먼저 앞서 실행하기엔 타이밍이 늦었고, 폭력을 이용한 협박조차 먹히지 않았다. 약속은 가능할까? 조커의 기대이득은 배트맨이 늦게 위치를 알아채고 움직이는 그 상황인데 이 값을 증가시키려면 더 늦게 배트맨이 알아채야만 한다. 이는 배트맨의 이익과 모순되므로 이 역시 실행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게임은 조커가 가져갈 수밖에 없는 확실한 결과의 게임이다.

두 인질이 잡혀 있는 장소가 좀 더 가까웠다면 두 사람을 모두 구할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하비 한 명밖에 구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한 쪽을 택하고 다른 한쪽을 경찰에게 맡긴 것은 탁월한 판단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둘중 어떤 곳을 구해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둘 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둘 다 구하고 싶다면 조커에게서 자백을 빨리 얻어냈어야 한다. 이는 레이첼과 하비의 방이 시한폭탄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에서 알아낼 수 있다. 그 말은 조커와 그 일당이 미리 폭파 시각을 정해 놓았다는 소리인데 정작 심문실에는 시계가 없다. 조커가 안에서 밖의 시계를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즉, 조커는 배트맨을 상태로 버티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몰랐다는 소리.

여기까지 배트맨이 생각했다면 둘 다 구할 수 있는 길은 명확해진다. 좀 더 일찍 심문을 시작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똑같은 상황까지 진행해서 조커가 자백을 했을 때, 실제로는 영화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남겨두고 자백을 한 꼴이 된다. 영화에서는 검은 옷 때문에 일부러 분위기를 잡아주려고 고든이 먼저 들어온 듯 하지만 그럴 거면 그냥 배트맨이 먼저 들어와도 상관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바뀌지 않았지만 행동을 실행하는 시간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게임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다. 그렇게 레이첼과 하비를 전부 구했다면 ‘하얀 기사’ 하비가 ‘투페이스’하비가 될 일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결정적 순간, 빌딩을 포위했던 고든이 전화 한통 때문에 현장을 떠날 일도 없었고 마지막의 인질극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거대한 시나리오가 바뀌지 않은 결정적 계기가 ‘배트맨이 일찍 등장하지 않아서’라는 단순한 까닭 때문이다.

 

장비가 게임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배트맨은 조커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째서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3가지 상황을 뽑아 간단한 게임을 구성해 보았다.

첫 번째 상황에서는 동시다발적 게임이 될 수 있는 게임을 ‘폐쇄적 명령’이라는 요소를 더해 판단 트리(decision tree)로 변화시킨 조커의 똑똑함을 알 수 있었고 두 번째 상황에서는 원거리에서 배트맨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있었음에도 굳이 치킨게임을 자처하고 게다가 그 게임에서 이기지도 못한 배트맨의 모자란 상황판단력을 알아낼 수 있었고 세 번째는 배트맨이 둘 다 살릴 수 있는 방안이 있었는데도 둘 다 죽이게 된 실행력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일반적인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에서 배트맨은 온갖 장비를 최고급으로 맞춘 ‘축케’(축복받은캐릭터)에 비유할 수 있다. 못 하는 것 없이 어떤 행동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조커는 레벨이 높은 것도 아니고 아이템이 좋은 것도 아닌 저주캐(저주받은캐릭터)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의 결과는 조커의 판정승이다. 경찰 2명은 배신자라는 이름 하에 하비에게 죽었고(게다가 이 2명은 결국 배트맨이 죽인 것으로 되어버렸다) 경찰서장, 판사도 조커에게 죽었다. 병원 하나가 완전히 날아갔고 시 경찰서도 폭파되어 기물훼손도 심하다. 무엇보다 그의 애인인 레이첼을 그냥 저 세상으로 보내버렸고 하비는 구했는데도 얼굴 반쪽을 태워 조커의 마지막 카드로 놀아난다. 이 협박극을 위해 죽은 사소한 배역과 우왕좌왕한 시민은 오죽 많을까?

장비나 객관적인 상황만이 게임의 정부는 아니다. 게임을 파악하는 정확한 능력. 게임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진행되도록 하는 방법을 조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커가 이긴 것이다. 배트맨이 죽을뻔한 조커를 살려주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배트맨은 조커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그의 전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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